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용문산 전투 (문단 편집) == 결과 == 이 전투에서 6사단은 5월 19일부터 21일까지의 '''2연대만의''' 확인 전과만 '''사살 및 포로 4,959명''',[* 출처: 제6사단 전투상보] 5월 18일부터 22일까지 사단 전체의 전과로는 육본 추정 적 병력 손실 판단 15,930명[* 출처: 육본 정기 정보보고 제143호(1951. 5. 22.)]이라는 큰 전과를 올렸다. 전과를 몇 만명까지 잡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용문산 방어전에서 바로 이어지는 지암리 포위전과 화천발전소 전투까지 모두 포함하는 광의의 용문산 전투를 뜻하는 것일듯. 엄밀히 말해서 제63군 잔여병력을 섬멸한 지암리 포위전과 중공군 5월 공세 전체를 끝장낸 파로호 전투는 각각 전자는 6사단을 포함한 미 제9군단 전체, 그리고 후자는 미 8군 전체의 반격작전이므로 6사단만의 전과로 잡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기간 전체를 포함할 경우, 제6사단 전투상보에 기록된 사단 전과는 5월 19일-30일간 사살 21,550명, 포로 2,617명에 달한다. 반면 6사단의 피해는 전사 및 실종 204명, 부상 494명으로 매우 경미했다. 제2연대의 끈질긴 우주방어, 미 공군과 포병의 압도적인 화력지원 등의 요소를 승리의 요소로 꼽을 수 있지만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단장 장도영 장군의 상식 밖의 전술이었다. 보통 경계부대는 관측, 화력 유도와 원거리 사격으로 적을 교란하고 적 주력이 다가오면 점차 후퇴하면서 지연전을 수행하며 주저항선으로 철수함으로써 적 공격을 지연, 주력 조기전개를 강요하고 아군 주방어지대를 기만하는 역할을 수행한 뒤 예비대로 전환한다. 그러나 6사단 경계부대인 제2연대는 축차 후퇴하다가 마지막에는 강력한 고수방어를 실시함으로써 경계부대로써는 가급적 회피되는 근접전투를 사단 주저항선의 한참 전방에서 수행했고, '''상식적인 판단'''에 따라 이처럼 필사적인 저항을 하는 2연대 진지가 당연히 주 방어선일 것이라 오인한 중공군 제63군은 여기에서 본대를 성급히 전개시켰음은 물론, 방어선을 일거에 제압하려고 군단 예비대까지 조기 투입하면서 손에 쥔 병력을 전부 들이부어 한타를 벌였다가 돌이킬 수 없는 대패를 맛보았다. 흔히 [[프리드리히 대왕]]의 "[[예비대]]를 갖지 못한 지휘관은 대사건의 방관자에 불과하다"는 어록처럼 예비대의 부재가 중국군의 패착이었다는 인식이 있으나 이는 어폐가 있다. 중공군 제63군은 예비 사단을 보유하고 있다가 판단착오로 조기 투입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에 대항하는 국군 6사단은 초반에 지연전을 수행하며 뒤로 물러났어야 할 2연대가 온갖 화력을 지원받으며 고수방어를 실시했고, 7, 19연대는 주저항선에 이미 투입돼 있었기 때문에 유연한 전투력 전환에 제한이 있었다. 즉 아측 종심상의 기동이 용이한 지점에 집결해 있다 전황에 따라 결정적 지점에 투입되는 "예비대"가 없는 것은 6사단이었다. 상기했듯 방어작전시 경계부대, 일반전초는 가급적 손실을 회피하면서 서서히 주저항선 밑으로 철수해 재정비 및 예비대로 전환하는데, 이 전초부대인 2연대가 주저항선 앞에서 고수방어를 수행하는 바람에 이변이 일어난 것. 이 점은 1983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전쟁전투사 용문산 전투 편에서 야전교범까지 인용해가면서 특이사항으로 지적한 사안이다. 괜히 미 육군 고문관이 왜 2연대를 철수 안 시키냐고 채근한 게 아니다. 하지만 장도영 장군의 이런 상식 밖의 전술이 제2연대의 놀라운 분전, 중공군의 중대한 오판, 그리고 사단을 뒷받침하는 각종 제반 여건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전사에 남을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전장의 불확실성에 대처할 예비대에 돌아갈 자원을 아측이 유리한 전초지대에 모조리 쏟아부음으로써 불확실성 자체를 감소시키고 승리를 거머쥐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제2연대의 시의적절한 축차진지 변경과 용맹한 고수방어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제2연대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중공군 군단급 부대에 맞서 북한강변의 최초진지부터 근접전투를 벌이면서도 제때 몸을 빼내 축차진지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에는 대대별로 사주방어를 실시하여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수 차례나 격퇴하고 진지를 사수해냄으로써 중공 제63군의 주저항선 오인과 예비대 조기투입이라는 치명적인 패착을 유도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거의 같은 시기 벌어진 [[현리 전투]]에서 포위당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없이 그대로 무너져 궤주한 한국군 제3군단과 비교해보면, 2연대는 [[사창리 전투]]의 오명을 씻은 것은 물론 현리 전투로 떨어진 한국군의 체면을 지켜냈다고 해도 과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미 제9군단과 공군의 엄청난 화력지원 역시 승리에 불가결한 요소였다. 6사단 제27포병대대 외에도 인접사단 포병과 군단포병이 제2연대 방어구역 전면에 주야를 가리지 않고 쉼없는 포격지원을 가하지 않았더라면 2연대라도 9:1 이상의 수적 열세를 버텨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중공군 예비대 제189사단은 19일 야간에서 20일 새벽 사이 초월공격을 실시하던 도중 군단포병의 맹렬한 포병사격에 휘말려 주저항선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주방어지대 전방에서 돈좌되었다. 미 공군의 근접지원은 야간에는 운용에 제한이 있었으나 주간에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중공군이 감히 공격이나 기동을 제대로 감행하지조차 못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이 대승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에게도 전해져 이를 기념해 화천호를 '''[[파로호]]'''(破虜湖, [[중국 인민지원군|오랑캐]]를 깨뜨린 곳)로 개명했고 이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을 정도니 이 전투의 의의를 짐작할 만하다. 몇몇 관련 기록 가운데는 아예 이 전투를 '''현대판 [[살수대첩]]'''이라고 부르고 있을 정도. 한편 [[정전 협정(6.25 전쟁)|정전 협정]]이 임박하자 [[김일성]]은 [[화천군|화천]] [[수력발전소]]를 절대 넘겨줄 수 없다며 탈환[* 38선으로 분단될 당시 화천 지역은 북한 땅이었다.]에 혈안이 돼 있었고, 이에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도 15개 사단을 2군단 전면에 투입하는 7.13 총공세에 돌입해 우선 [[금성 전투]]를 벌여 금성천 북쪽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연이어 일어난 [[백암산 전투]]에서 몇몇을 호수 쪽으로 내려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휴전을 앞둔 시점에서 [[425고지-406고지 전투]] 등을 벌였지만 결국 탈취에 실패해 호수 전체가 남한령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